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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언 작가의 기행문. 책은 한때 승려가 되어 수행자의 길을 걷다 환속을 결정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작가가 코로나19를 계기로 자신의 이상향인 ‘득량만’을 찾아 떠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양승언 작가의 경험담과 인생사는 특유의 간결하고 운율감 있는 문체로 전개된다. 자본주의와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가 체제에 대한 비판, 무엇보다도 득량만(이 책에서는 주로 보성 지역을 다루고 있다)이라는 장소에 대한 작가의 깊은 시선과 애정이 돋보인다.

최근작 :<득량, 어디에도 없는>,<사랑은 소리 없는 침범> … 총 2종 (모두보기)
소개 :

양승언 (지은이)의 말
득량만, 바람처럼 떠나가고 싶은 마음 여행 1번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은 여유 있는 사람이다. 그 가운데도 시간의 자유만큼 아득한 대상이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에 쫓긴다. 창의적인 예술가나 사업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해진 시간에 맞춰 출근하고 똑같은 일을 하는 직장인이라 하더라도 저승사자처럼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간에 쫓기며 산다. 자본주의 세상을 사는 현대인의 비애다.

그러나 뜻밖의 휴가를 얻거나 사나흘씩 연휴를 갖게 되더라도 사람들은 주저하며 망설인다. 그토록 바랐던 여유로움이었지만 정작 무엇을 할지 모른다. 도리어 주어진 여유 앞에서 고민하고 허둥댄다. 설레는 여행을 놓고 말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어디로 갈 것인지, 어떻게 쉴 것인지, 심지어는 무엇을 먹을 것인지를 놓고도 의견의 충돌을 빚거나 계획을 세우지 못해 아까운 기회를 그냥 버리고 만다. 하긴 시간과 돈과 건강,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떠날 수 있는 마음 여행 1번지를 갖기란 쉽지 않은 문제다. 또 여행지 대상만의 문제도 아니다. 여행을 가거나 거기 살고자 하는 사람의 인생과 세계에 대한 안목이 더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거나 그곳을 떠나 있거나 내 마음이 늘 서성거리는 곳, 바람처럼 떠나가고 싶은 곳은 남도다. 득량만이라는 대명사를 붙이는 곳, 전라남도 보성이다. 거기는 어느 때 가더라도 먹을 것, 볼 것, 놀 것, 쉴 곳들이 산비탈 돌멩이처럼 흔한 곳이다. 자치단체에서 공들여 가꾼 것도 많지만, 지역의 본래 생태가 충분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산과 강과 들과 바다와 하늘이 고루 갖춰진 천혜의 땅이다. 풍수의 선각자 도선국사가 점찍은 명당도 보성 일림산 자락이다.

너무나 도시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생활에 지치거나 마음속에 흉터 생기고 감정에 구더기 같은 우울한 슬픔이 도사릴 때, 또, 따뜻한 햇살이 이유 없이 내 등을 떠밀면 나는 오래된 차에 기름을 채우고 지체 없이 남도로 떠난다. 다섯 시간씩이나 휴게소 한번 들르지 않고 득량만 보성으로 간다. 가장 먼저 찾는 곳은 회천면 율포바다다. 수산물위판장에 들러 낙지 몇 마리, 인근 슈퍼에서 다향막걸리 한 병을 사서 선창 바지선으로 올라간다. 언제 만나도 득량만 율포바다는 풍요롭다. 내가 어떤 감정을 들고 다가가도 상관없다. 그 선창 바지선 위에 철푸덕 앉아서 나는 막걸리를 마시고 낙지를 오물거리면서 어머니로부터도 다 받지 못한 결핍된 사랑을 채운다.

‘괜찮아.’
묵시의 바다는 조용한 성자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내 마음도 망망한 바다가 된다. 그 바다와 만나면 어떤 슬픔과 아픔도 낮게 가라앉는다. 모든 일들은 괜찮을 뿐이고, 세상살이 어떤 어려움이나 아픔도 견딜 만해진다. 사랑의 통증도 가신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노력하고 싶다. 깊고 넓은 침묵 속에서 어떤 고통도 견디고 어떤 분노도 용서할 수 있는, “참말로 암시렁토 않은” 용기와 아량이 솟는다.

나는 선창에 머물다가 율포바다를 거닐다가 율포해수녹차탕으로 간다. 많은 지방자치단체장에게 권유하고 싶은 정책이 있다. 특히 그 지역이 농어촌이라면 멀쩡한 보도블럭 바꾸지 말고 과다한 예산을 책정해서라도 목욕탕을 잘 지으라고. 현대문명이 인간에게 주는 최고의 혜택 가운데 하나는 목욕탕이 아닐까 한다. 시설이 잘 갖춰진 목욕탕은 어떤 공간보다도 행복한 휴식 공간이다. 율포해수녹차탕은 행복의 도가니다.

내 삶의 우선 조건은 항상 몸이다. 모든 것들은 배고픈 허기를 우선 채워야 하며 피곤한 육체를 쉬게 한 다음이다. 몸을 달랜 뒤에는 마음의 갈증을 풀어준다. 산을 볼 수도 있고 들을 볼 수도 있고 바다며 하늘도 볼 수 있는 길.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반듯한 고속도로나 무슨 둘레길이니 올레길이니 하는, 어딜 가나 비슷하게 기획하여 가꿔놓은 곳은 썩 내키지 않는다. 필요한 만큼의 시설이야 정비해야겠지만 되도록 농촌에서는 농촌의 모습이, 어촌에서는 어촌의 모습이 옛 전통을 이어가며 온전히 살아있길 바란다. 보성 회천에서 벌교까지 이어지는 득량만 해안도로는 그런 자연과 전통이 오롯이 보전된 흔치 않은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다. 바닷가 선창에는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고 들에는 쪽파나 감자 같은 농작물이 자라고 있다. 일부러 수십만 평에 가꾼 대단위 꽃밭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의 원형적인 삶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런 생생하고 진실한 풍경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나는 2년 정도 득량만 보성의 산과 들에 살면서 몸으로, 마음으로 절절하게 느끼고 깨달았다. 어떤 때는 깨달음을 얻게 된 수도승처럼 오도송(悟道頌)을 토하기도 하였다. 늘 바람처럼 떠나고 싶은, 내 마음 여행 1번지인 득량만 보성 이야기를 시작한다. 『득량, 어디에도 없는』에는 결코 조작하여 꾸며내거나 과장된 미화가 없다. 지방의 농어촌 어딜 가나 뻔한 상투적인 전통의 재포장 따위도 아니다. 너무나 도시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세상에 갇혀 사느라 미처 몰랐던 뜨거운 남도 지오그래피, 오늘의 남도 아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