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니 (시인)
: 안희연은 어떤 슬픔의 자리를 끝없이 되묻고 되묻는다. 되돌아가 떠올리게 되는 최초의 슬픔 속에서. 다른 이름으로 되풀이하여 찾아드는 이후의 슬픔을 마주하면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한 사람의 죽음, 아니 죽었으나 여전히 살아 있는 그 모든 생명을 되살리면서. 다시 제대로 죽어가는 영원의 순간으로 되짚어내면서. “최선을 다해 산 척을 하는”(「업힌」) 방식으로 삶을 견디고 있는 자신을 제 곁의 사물들이 일제히 쳐다보는 순간을 아프게 자각하면서. 너무나 작다고 믿어왔던, 그러나 실은 “너무 커다란 우리의/영혼을 조망하기 위해”서 “뒤로 더 뒤로 가보기로” “멀리 더 멀리 가보기로”(「자이언트」) 하면서.
이때 이 언어는 그저 겨우 나아갈 뿐인 언어로서. “사실은 흰 접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흰 접시의 테두리만 만지작거”(「시」)리는 무엇으로서. 그렇게 그 무엇도 밝혀낼 수 없는, 오직 지시하는 대상 그 자체만을 간신히 지시할 수밖에 없는 언어를 통해 존재의 결핍을 그대로 껴안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삶의 충만함을 온전히 드러내 보여준다.
“‘밤이 밤이듯이’ 같은 문장을 사랑하기”(「호두에게」)로 하면서, 살아 있기에 울 수 있는 인간의 바닥을 연민 없이 바라보는 것. “슬픔의 입장”(「폭풍우 치는 밤에」)을 헤아리는 섬세하고도 정확한 문장을 통해,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소동」)는 깨달음의 우화와도 같은 이 낱낱의 시편들을 통해 안희연은 기어이 어떤 연약한 강인함에 가닿는다. 그리하여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눈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열과」)라는 시집의 맨 마지막 문장에 도착했을 때 어느덧 나는 너무 많은 슬픔을 담담히 걸어가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