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천마 0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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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1화



짧은 생이었다.

병약한 몸 때문에 늘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결국 이팔청춘, 열여섯의 나이로 요절.

‘다시 태어날 땐 누구보다 튼튼한 몸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다.

검법이라던가 내공이라던가 아무튼 무공이 있는 세상에,

아주 튼튼한 몸으로.

태어나보니 고관대작의 아들이라던가, 대상단의 후계자라던가, 하다못해 중소방파의 후계자라던가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행운은 없었다.

오히려 태어난 직후 창궐한 역병 탓에 부모를 잃고, 객잔을 운영하는 숙부에게 의탁해 점소이로 일하며 그럭저럭 입에 풀칠을 하는 정도였다.

점소이로 일하며 손님들로부터 소위 ‘무림(武林)’이라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쇠도 두부 썰듯 썰어버리고, 손에서 장풍도 나가고, 한걸음에 몇 장씩 쭉쭉 나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물론 금혁은 그런 사람들과 엉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제일 강하다!’며 이름을 날리고 싶지도 않았고.

다만 숙부처럼 매일 흑도 패거리에게 굽신대며 살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무공은 배워둬야 할 것 같았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세상이었으니까.

금혁이 자신의 근골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안 것은 꽤 오래된 일이었다.

이따금 객잔에 들르는 무림인들 중 금혁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가 적잖았기 때문이다.

특히 화산파 속가 제자 출신인 삼매검(三梅劍) 동진웅은 금혁을 제자로 들이기 위해 삼고초려를 불사할 정도였다.

“금혁아, 잘 생각해 보거라. 내가 찾아오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란다.”

“송구합니다, 대협. 저를 좋게 보아주심은 매우 감사한 일이지만, 제가 없으면 숙부님이 객잔 일을 고되게 하셔야 할 것 같아서요.”

“허, 심성도……. 그래, 내 너희 숙부가 일 년간은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은자를 주마. 그러면 되겠느냐?”

“제 대답은 변함없습니다, 대협.”

꾸벅 고개를 숙이고 제 숙부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금혁.

동진웅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뿌리는 화산이었지만, 속가 제자의 한계를 넘고자 부단히 노력해 온 세월이었다.

이제 그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었고, 자신만의 검공을 창안해 세인들의 인정도 받았으니 이제 일가(一家)를 이루고 싶었다.

그러려면 일단 대제자를 받아야 했다.

어중이떠중이 다 받은 다음에 선착순으로 대제자를 정할 순 없으니까. 모름지기 대제자는 문파의 미래이자 얼굴이었다.

금혁을 본 건 이번이 세 번째지만, 눈동자에 총기가 도니 셈에도 밝았고, 제 숙부를 돕는 걸 보니 심성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근골!

전설에 나오는 천무지체나 용혈지체 같은 체질은 보는 법도 모르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허나 또래 애들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크고 뼈마디가 굵은 금혁은 누가 봐도 무골임이 분명했다.

동진웅은 처음 객잔에서 금혁을 보자마자 자신의 제자로 들어올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벌써 세 차례나 권했는데도 금혁이 거절을 한 것이다.

이쯤 되면 더 권하기도 체면이 상하는 일이 아닌가.

아쉽지만 놓아줘야 할 것 같았다.

쩝, 입맛을 다시며 동진웅이 중얼거렸다.

“딱 대제자 감인데 말이야…….”



* * *



‘어림도 없지.’

숙부의 심부름으로 식재료를 사러 가면서 금혁은 조금 전 동진웅을 만난 일을 떠올렸다.

물론 동진웅은 이 청양현에서도 꽤 유명한 인물이었다.

화산파 속가 제자로서의 명성도 있지만, 본신의 실력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 세인들의 평이었다.

다만 금혁의 눈에 차지 않았을 뿐이었다.

‘속가면 그러니까, 지방 캠퍼스 같은 거잖아?’

화산이 대단하다는 건 금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산도 아니고, 속가 제자의 제자로 들어간다?

기왕에 나쁘지 않은 체질을 타고났으니 신중히 스승을 고르고 싶었다.

동진웅의 생각처럼 숙부를 생각해서 떠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금혁의 눈에 동진웅이 차지 않았을 뿐이었다.

숙부에게 입은 은혜는 이미 무임금으로 수년간 노동을 해왔으니 갚았다 치고, 좋은 스승만 나타나면 언제든지 따라갈 의향이 있는 금혁이었다.

“어?”

금혁은 누군가의 신발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본 적이 있었다.

꽤 고급의 신발이었는데 지금 향하고 있는 식재료 가게 주인인 목 씨의 딸인 목청향의 것이었다.

목 씨가 크게 마음먹고 사 준 신발이라 했다. 목청향이 아껴가며 조심조심 신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 신발이 한 짝만 버려져 있다?

‘무슨 사달이 난 것 같은데.’

금혁의 눈이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무언가 질질 끌려간 자국들이 보였다.

‘청향 누나인 것 같은데.’

발버둥을 친 것 같은 흔적이 보였다.

금혁은 흔적을 쫓기로 했다.

흔적들은 담을 따라 마을 외곽으로 이어졌다. 이내 한 무리의 청년들과 목 씨, 그리고 목청향이 보였다. 금혁은 담에 기대 숨었다.

“너무한 거 아니냐, 이놈들아!!”

“참나, 그러게 돈을 째깍 갚았으면 될 일 아니오?”

퉤!

한두 번 침을 뱉어 본 솜씨가 아닌 듯한 청년이 빈정거렸다. 무리의 대장처럼 보였다.

목 씨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내가 빌린 돈이 은자 열 냥이었다. 그런데 삼십 냥을 갚으라고? 그게 말이나 되느냐?”

“거, 뒷간 들어갈 때랑 나올 때랑 마음가짐이 다르다더니…….”

청년이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들었다.

“자, 눈이 있으면 똑바로 보쇼. 월리(月利)로 삼 할이라고 적혀 있지 않소? 여기 댁의 지장도 큼지막하게 찍혀 있고.”

“이, 이, 이런 사기꾼 놈들이! 네놈들이 분명 연리(年利)라 하지 않았더냐?”

금혁은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알아챘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이들이 흔한 시대였다.

목 씨가 까막눈임을 이용해서 놈들이 사기를 친 것이 분명했다. 동시에, 놈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놈들은 ‘독사파’였다.

독사파는 주먹질 좀 하는 놈들이 모여 흑도 방파입네 뭐네 하면서 만든 곳이었다. 두목은 독사라는 인물이었다. 본 적은 없지만.

지금 목 씨를 둘러싸고 있는 놈들은 보통 보호세니 뭐니 하면서 숙부의 객잔에서도 종종 돈을 뜯어 갔기에 얼굴이 익숙했다.

체격이 남다른 금혁에게도 이따금씩 독사파에 들어올 것을 넌지시 권했던 적도 있었다.

“뭐? 사기꾼? 안 되겠네, 이거? 진짜로 하나뿐인 딸내미가 팔려나가는 꼴을 봐야겠단 말로 들리는데.”

꺄악!!

비명이 터졌다. 청년이 목청향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확 꺾은 까닭이다. 얼굴이 잘 드러나도록.

“그래도 딸년이 제법 반반해서 다행이야. 이 정도면 이십 냥은 받고도 남지, 암.”

흐흐, 실소를 흘리며 청년이 말했다.

“제발, 제발 우리 가족을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고개가 뒤로 꺾인 채 목청향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애원하는 음성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네 아비를 원망하거라. 우리는 그저 받아야 할 것을 받을 뿐이야. 자, 목 씨. 마지막 기회다. 잘 생각해.”

“……벌어서 갚겠다. 조금만 시간을 다오.”

“하, 그깟 야채 장사해서 대체 어느 세월에? 그냥 우리한테 가게를 넘기라니까. 삼십 냥 쳐줄게.”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가게가 없으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먹고 살란 말이냐…….”

“거야 내 알 바 아니고…… 그래, 목 씨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내 미리 일러뒀지.”

“뭐?”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아, 저기 오는군.”

다가닥, 다가닥-

말발굽 소리가 먼지를 동반하며 다가왔다. 마차였다.

청년이 흐흐,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오늘도 그냥 겁만 주고 끝낼 줄 알았나? 어림도 없지. 우리 독사 형님이 자비는 한 번뿐이라고 하셨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딸내미를 팔아치울 거야.”

“뭐? 안 된다!”

‘미친 건가?’

금혁은 깜짝 놀라며 욕지거리를 삼켰다.

상황이 흘러가는 모양새가 급박했다. 놈들은 아무래도 진짜로 목청향을 팔아넘길 셈인 것 같았다.

한편, 금혁은 목청향과 눈이 마주쳤다. 놀라 몸을 뒤로 젖히던 와중이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은 마차를 향해 있었다.

목청향의 눈이 조금 커졌다.

‘누나, 조금만 기다려. 금방 올게.’

끄덕.

다행히 금혁의 입 모양을 알아본 듯했다.



* * *



‘미친놈들! 정도가 있지.’

달리면서도 금혁은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청양현은 작지만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독사파니 뭐니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놈들도 청양현 토박이였다. 같은 마을 사람이라는 뜻이다.

넘치는 혈기를 주체 못 하고 왈패 짓을 일삼고 다니는 놈들.

모르긴 몰라도 목청향이 어릴 때부터 이웃집에 살던 놈도 있을 터였다.

언젠가 독사라는 놈이 마을로 오고 나서부터 하는 짓들이 점차 심해지긴 했지만.

지금 놈들은 완전히 선을 넘었다.

쾅!

“대협, 동 대협!”

부서져라 문을 열어젖힌 금혁은 호흡을 고르는 것보다 먼저 동진웅을 찾았다. 다행히 그는 아직 객잔에 있었다.

“오, 금혁아! 생각이 바뀌었더냐? 그래, 잘 생각했다. 내 너를 대제자로…….”

“대협, 도와주세요! 청향 누나가 팔려가려고 해요! 독사파 놈들이…….”

“무어라?”

금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동진웅이 성큼 다가섰다. 그간 금혁이 봐왔던 표정과는 달랐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동진웅이 말했다.

“안내해라, 빨리!”



* * *



‘대단했지.’

금혁은 동진웅의 검격을 떠올렸다.

당시, 동진웅은 도착하자마자 놈들의 머리를 뎅겅 잘라버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응징이었다.

사람의 머리가 그렇게 쉽사리 잘리는 것인지 금혁은 처음 알았다.

나중에 동진웅에게 듣기로는 내력을 실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렇지만 비현실적인 광경인 건 여전했다.

일검에 한 명씩.

뎅겅, 뎅겅, 뎅겅…….

목청향을 데려가겠다고 온 놈들도 때 이른 추풍낙엽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마을은 온통 독사파를 성토하는 분위기였다.

독사파가 아무리 주먹을 앞세워도 한 마음으로 압박하는 청양현을 이겨낼 순 없었다. 결국 독사파는 해체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사실 마을 사람들보다는 삼매검 동진웅이 무서웠던 것이리라. 화산파 속가제자의 무위가 청양현에서는 가히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금혁은 목청향을 구해낸 소영웅이 되어 있었고, 목 씨는 금혁의 숙부의 객잔에 일 년간 무료로 식재를 대주기로 했다.

대신 사소한 조건이 있었는데, 바로 매일 목청향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목청향이 제 아비와 금혁 말고는 아무와도 얘기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큰 충격을 받은 때문이었다.

그러기를 달포.

‘회복이 돼서 다행이야.’

이제는 웃기도 하고, 집 앞까지는 산책이 가능해진 목청향이었다.

금혁은 그런 그녀를 생각하며 객잔으로 돌아가던 참이었다.

퍼억!

골목길을 돌자마자 누군가 금혁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금혁은 커억! 소리와 함께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너.”

몹시 차가운 목소리였다. 꾹 눌러담은 분노가 느껴지는.

“누, 누구?”

금혁이 겨우 입술을 열었다.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서른이나 되었을까,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였다.

“독사다. 네놈 덕분에 망한.”

스릉-

사내가 칼을 꺼내든다. 눈이 희번덕거리는 것이 보통 독기가 아니었다.

독사파의 두목 독사는 생각했다.

이 어린놈의 자식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까?

자신이 이 청양현에 와서 기존의 주먹패들을 다 쓰러뜨리는 데 일 년, 또 동네 어리숙한 놈들을 꼬드겨서 독사파를 만들어 보호세를 거두는 등 안정적인 수입원을 만드는 데 또 일 년, 그렇게 만든 재원으로 고리대금업 등을 하며 조직을 키우는 데 또 수년.

그렇게 독사파를 불로소득으로 만들어 놨더니 요 맹랑한 꼬마 놈이 다 망쳐버린 것이었다.

조직원들도 다 떠나버렸다.

-난 떠나겠어. 당장 독사파에서 나오지 않으면 어머니가 자결하겠다하시던데.

-우리가 돈을 갚으라고 협박은 하지만, 진짜로 팔아넘길 생각을 할 줄이야…….

-나도. 이제 그만하겠어. 삼매검을 마주칠 때마다 오금이 저린다고.

-두목도 조심해. 삼매검이 두목의 인상착의를 묻고 다녔다는 얘기가 있어.

물론 잘잘못을 따지자면야 독사파가 잘못한 게 맞았다. 까막눈인 목 씨에게 계약 조건을 속여 돈을 빌려줬으니. 게다가 목청향을 진짜 팔아넘기려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금혁 때문에 독사파가 망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독사는 분풀이를 할 대상이 필요했다.

금혁이 삼매검한테 일러바치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조용히 마무리되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아니, 필시 그랬을 터였다. 동진웅도 조용히 청양현을 떠났을 테고 말이다.

“그래, 어차피 독사파도 끝났고 삼매검 때문에 기왕 청양현을 떠야 하게 생긴 마당이다. 갈 때 가더라도 네 녀석 오장육부라도 구경하고 가야겠다.”

‘미치겠네.’

금혁은 살기로 번뜩이는 눈알을 보며 상대에게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곧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진작 동진웅을 따라갈걸!

괜히 간만 보다 건강하게 태어나고도 병약했던 전생보다 일찍 죽게 생긴 것 아닌가.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알라시여. 뭐가 됐건, 살려주세요. 제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

오랜 습관이 나왔다.

전생, 병약했던 시절 늘 병원 신세를 졌던 금혁은 수술에 들어가기 전이나 고통이 너무 심할 때는 항상 신을 찾았다.

신앙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뭐라도 주워섬기면 통증이 조금이라도 가시는 느낌이었고, 금박이 마음에 들어 가지고 있던 성경책의 구절을 외우곤 했던 것이었다.

“이승을 하직할 준비는 됐느냐?”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금혁은 문득 생각나는 구절을 읊었다. 살려달라 애걸복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마음을 굳게 먹고자 할 뿐이었다.

그런 금혁의 모습이 독사의 심기를 건드린 것일까.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 칼을 두려워해? 지금 누가 누굴 두려워해야 하는지…….”

거기까지였다.

퍽!

눈앞에서 사람의 머리가 두부처럼 으깨져 버리는 광경은 꽤 비현실적이었다.

그것도 망치나 곤봉 같은 게 아니라 사람의 주먹에 의해서 말이다.

주먹의 주인은 민머리의 스님이었다.

핏빛 손으로 합장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잿빛 가사를 입은 승려가 금혁에게 말했다.

“아이야, 방금 무슨 짓을 한 게냐?”

신성천마


지은이 : 화계

제작일 : 2021.05.20

발행인 : (주)고렘팩토리

편집인 : 김레아

표지 : 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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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7051-916-4(1)